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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orite diary

원정리 느티나무, 쉼표는 숨표다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황유원, '세상의 모든 최대화' 중) 여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그대에게, 빨간색 쉼표를... 쉼표가 세 개나 찍혀 있는 추석 연휴, 고향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원정리 느티나무를 기억한다. 그 500년 된 그늘에 쉼표처럼 앉아 있던 그대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긴 문장으로 살아왔다. 많은 일을 한 문장으로 끝내려 쫓기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이제 그러지 말자. 사람은 숨을 참으면 죽는다, 고 한다. 짧게, 짧게 끊어서 숨 쉬면서 살자. 원정리 느티나무 아래, 쓸모없는 짐 다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 군말 없이 받아준 느티나무가 고맙고, 여기까지 잘 따라와 준 그 사람이 고맙다. 눈물 나게 고맙다. 더보기
사소한 가을 이도 저도 마땅치 않는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중) 청암사 계곡 깊이 물든 고운 단풍 바라보며 아내가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이들 키우며 살았다면... 지금부터는 아이가 되어버린 부모님을 보살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이 참으로 고맙다. 부모님이 그 일을 마치고 아이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제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슬며시 일러주는 아내가 고맙다. 이렇게 고마운 일은 사소한 것이다. 얼마 뒤 누나로부터 전해 듣다. 늦은 가을 수도산자연휴양림에서 아들 내외와 보낸 사소한 하룻밤이 그렇게 좋았.. 더보기
그냥 그런 거다 나는 '그냥'이란 말이 참 좋더라. 특별한 이유는 아니면서 그것만큼 확실한 이유도 세상에 없는 것 같아. (정도상, '낙타' 중) 때로는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얻어지는 사진이 있다.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상관없이 그냥 살아지는 삶처럼 말이다. 공주 중동성당을 찍으러 갔는데, 성당을 내려가는 계단에서 노란 담벼락을 보았다. 우리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많이 바빠야 한다. 집에선 자기주장만으로 거친 대화를 되풀이하는 모녀가 있고, 회사에선 얼떨결에 안은 전임자의 폭탄과 현장을 떠난 포퓰리즘 정책의 꼬리도 있다.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왜?, 하필 내 앞에 왜?, 라고 물어도 소용이 없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이유를 모른 채 벌어지는 일 투성이니까. 그냥 그런 거다. 노란 담벼락에 봄 .. 더보기
아플 때에는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해줄 사람 곁으로. (대니얼 고틀립, '샘에게 보내는 편지' 중) ​ 딸아 미안... 우린 무탈하게 잘 지내는 줄 알았다. 혼자 아파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자기만의 그림을 찾는 것, 자기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건 고통 없이 얻어지지 않는단다. 때로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기도 하지. 손쉽게 비난하기도 하고, 섣불리 충고하기도 한단다. 세상에는 내 맘과 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 타인의 평가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 전력질주를 멈추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렴.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 더보기
조고각하(照顧脚下), 마곡사에서 배우다 마곡사 섬돌 위에서 낡은 한자 넉 자를 발견했습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인 듯합니다. "발 밑을 살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람에 등불이 꺼지면 발 밑을 살피겠지만, 지금까지는 발 밑이 어떠한지 모르고 살았던 게 사실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나는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내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는 일이 풀리지 않거나, 의미 없는 일이 바쁘게 할 때, 그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이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살피고 반성하는 일로부터 진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발을 신고 벗을 때마다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낮은 곳, 내 발 밑에 해답이 있다는 의미를 말입니다. 더보기
나이테, 인생의 우여곡절 아무런 고난 없이 평탄한 인생을 사는 열대지방 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나이는 많지 않다. 해가 바뀌면 저절로 나이를 먹는 줄 알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추운 겨울을 인내하며 봄을 기다려도 보고, 여름 폭우처럼 성장하다가 한순간에 가을 낙엽처럼 추락도 해보고, 그 떨어진 찬 바닥에서 노숙도 해보고... 그런 세월의 우여곡절을 세포막에 담고 있는 것이 나이테가 아닐까. 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문득, 나무의 나이로 환산했을 때, 내 나이는 얼마일까 궁금해진다. 더보기
계족산, 부부로 산다는 것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천양희, '친구' 중) 이유가 있어야 만나는 사람을 '지인'이라 하고, 이유가 없어도 만나는 사람을 '친구'라 한답니다. 그리고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을 '연인'이라 한다지요. 아내가 이제부터 '친구'로 살자고 합니다. 나는 '대답 없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지인'으로 만나 '친구'처럼 지내다, 잠깐 '연인'이 되었다가, '부부'로 살고 있는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가끔은 떨어져 있고 싶은 '지인'처럼? 속내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 '절친'으로? '인연'이 없으면 결코 될 수 없다는 '연인'의 모습으로 살아.. 더보기
낙안읍성에서, 어떻게 머물 것인가 큰 꽃은 단지 클 뿐이고, 작은 꽃은 단지 작을 뿐이다. 오래 피어 있는 꽃은 오래 피어 있을 뿐이고, 일찍 지는 꽃은 일찍 질뿐이다. 그것은 차이이고 다양성일 뿐, 우열이 아니다.(이승헌, '세도나 스토리' 중) 화려한 꽃을 피워 세간의 이목을 끄는 벚나무는 60년을 살고, 무엇이 꽃인지도 모르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500년과 2000년을 산다고, 숲해설가가 말했다. 찬란함으로 짧게 머물든, 은근함으로 오래 머물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세상에 머무는 방식도 나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든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인지 나그네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열을 가려 무엇할까. 붉은 꽃과 푸른 잎을 보면서 언.. 더보기